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세계 질서에 대한 여러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그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신냉전’이다. 과거 소련이 점했던, 미국과 경쟁하는 초강대국이라는 위치를 중국이 차지하면서, 미중 G2로 양대 초강대국 경쟁이 부활하고 있다는 관찰이다. 이러한 설명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반서방’ 블록도 제시된다. 중국은 태평양에서 미국과, 중국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와, 이란은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맞서는 공동 연대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시아의 한미일 동맹과 유럽의 나토, 중동의 이스라엘이 유라시아 육상 세력의 블록화에 맞서서 결속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냉전의 핵심 요건, 세력권과 보편 이념

하지만 이는 과거 20세기 냉전 시대의 경험을 오늘날에 소급하여 이해하는 관점으로, 현재 세계의 복잡한 변화상을 담아내기에는 불충분하다. 냉전 시대에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이 각자 자신들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국가들을 모아 블록을 형성했다. 블록 간의 교역과 교류는 제한적이었고, 블록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따라 뭉쳤다. 하지만 현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냉전 시대에 형성된 다자 동맹을 여전히 근간으로 삼고 있는 서방 진영에는 자유주의 이념이 여전히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비서방 진영에 산재한 주요 국가들을 보면, 그들이 공통된 이념으로 전혀 묶이지 않음을 금세 알 수 있다. 중국은 중화민족주의와 레닌주의를, 러시아는 정교회, 유라시아주의, 소련의 유산을 묶은 러시아 이념을, 이란은 이슬람 시아파 신정 공화국을 채택하고 있다. 이들 사이에 모종의 공통점이 있기는 하더라도, 이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넘어서는 초국적 이념과 교리에 묶이지 않는다. 따라서 중국, 러시아, 이란의 연대도 서방과의 경쟁 및 갈등 최전선에 놓인 국가들 간에 이해관계가 합치하며 형성된 실용적 연합이지, 이념에 따른 블록 결속이 아니다. 사실 각국이 서방과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던 20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삼국 사이에 상호 불신이 만연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중국, 이란의 부상은 ‘유라시아 반서방 블록’의 형성이 아니라 다극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한편 2020년대는 유라시아 각지에서 삼국과 서방의 대치 및 갈등이 격화되는 시기였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무역 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이 그렇다. 이 경쟁의 결과를 두고 근래에는 ‘서방 제국주의 패권의 종말’ 혹은 ‘전체주의 세력의 위기’라는, 냉전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이념적 주장이 굉장히 흔하다. 하지만 서방과 유라시아 삼국 간 경쟁의 진짜 파급 효과와 그 의미는 어느 한쪽의 승리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서방과 구태여 대치하지는 않더라도, 서방이 운영해온 세계질서로부터 자율성을 발휘하며 독자적 외교 노선을 걷는 국가들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2010년대가 중국, 러시아, 이란이 주도한 ‘다극화의 시작’이었다면 2020년대는 이 새로운 국가군들이 유라시아 지정학에서 각자 역할을 수행하며 구도를 복잡하게 만드는 ‘다극화의 심화’라고 규정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