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크라이나의 지속적인 정치 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세계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심도 크게 늘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혼용되어 쓰이던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식 인명, 지명 표기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우크라이나 역사를 소개하는 여러 책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향한 관심은 주로 피침략국 우크라이나에 대한 동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자연히 ‘동구 전체주의 러시아의 압제’에서 벗어나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 문명’으로 합류하고자 한다는, 현재의 전쟁과 연관된 지나친 목적론적 사관이 대중적인 차원에서 널리 퍼진 상태다. 하지만 이런 전형적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사관은 드넓은 우크라이나 땅에서 벌어진 실제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와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가 겪은 혼란과 갈등을 설명해내지 못해, 사태 이해를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유럽 지향 사관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함께 소련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공화국 중 하나로서, 소련 체제의 핵심 지도부를 다수 배출했으며, 소련에서 최대 규모의 산업 투자를 받은 사실은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나누는 정체성의 흐릿한 경계도 실제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표현된다. 아울러 우크라이나가 지닌 모든 문제도 서구와 러시아라는 더 큰 지정학적 플레이어 사이의 관계 문제로 환원되어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기도 한다.
물론 드네프르 강을 기점으로 나뉘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의 상이한 정체성은 우크라이나 역사를 이해할 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배경 지식이며, 실제로도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의 정치 위기를 계속해서 자아내는 기본 조건이었다. 우크라이나가 지역별로 상이한 정체성을 지닌 이유는 우크라이나 국민과 국경이 형성되는 복잡한 과정에 기인하고 있다. 몽골에 의한 키예프 루시의 멸망 이후, 루시는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로 분화해 나갔고, 남서쪽의 우크라이나는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권력이 자리한 경계지대가 되었다. 그러나 17세기에 강성해진 모스크바의 차르는 점차 우크라이나로 세력을 확대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다. 분화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국 권력에 다시 통합되었기에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와 명확히 경계를 그을 수 없었고, 러시아어와의 유사성은 지역에 따라서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전통적으로 크림 칸국의 영역이었기에 우크라이나와 연관이 거의 없었던 남동부 지역(노보로시야)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이주민이 대거 유입되었는데, 러시아인 인구 비중이 높고 러시아 산업지대와 연계가 컸던 이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더 강하게 러시아와 유대감을 느꼈다. 반면에 폴란드 지배 기간이 길었던 서부와 중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지향성이 상대적으로 덜했고, 특히 스탈린의 전후 국경 조정으로 처음 러시아 통치를 받게 된 갈리치아와 리비우 등지의 극서부 지역은 더더욱 그랬다. 소련의 공화국 경계 구획으로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을 한 여러 지역이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으로 뭉치게 되었고, 이 경계에 따라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독립하게 되며 우크라이나는 금세 정치적 분열을 마주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