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시대의 선도국가

새로운 다극 세계에서 한국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한국인들은 이러한 질문에 익숙한 편이 아니다. 한국의 역사는 편하게 의지할 수 있는 일극의 제국에 편승할 때 큰 이득을 보았던 역사였고, 제국의 해체와 다극 세계의 도래는 언제나 한국인들에게 시련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전통 시대 한국은 중화 제국의 우산 아래에서 발전했고,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 제국, 현대에는 미 제국과 함께하며 이득을 보았었다. 그러나 중화 질서가 무너질 때 한국은 자주적 힘을 마련하지 못하고 일본에 의한 식민화를 겪어야 했고, 일본 제국이 해체될 때에는 분단과 전쟁을 겪어야 했다. 미 제국이 유라시아에서 퇴조할 때도 한국은 마찬가지 위기를 겪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기민한 판단력으로 생존을 도모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독자적인 중심과 표준을 형성하기에는 너무 작고, 그렇다고 다극 세계의 지역적 제국에 일방적으로 편승하기에는 또 지나치게 커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서구와 다극 세계 제국들 어디에도 편입되지 못한, 다른 국가들과의 연대를 도모하고 그런 국가군에서 통용될 수 있는 전범과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일일 것이다. 그 시작을 아세안으로 삼고 나아가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동유럽, 아프리카까지 확장할 수 있다. 만약 도시, 산업, 기술, 군사, 이주, 문화 등 한국이 새로운 전범을 만든다면 한국에 우호적인 이 같은 중견 국가군들은 한국의 외교적 우군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다가올 세계의 위기에 한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다극 세계 속에서 제국에 속하지 않은 국가 중 가장 선도적인 국가 정도일까? 한국의 역할을 그 수준에서 그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위한 지향점이 되어야만 한다. 장차 다가올 위기는 생태, 지정학, 디지털에서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생태와 지정학의 면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생태에 개입하기에는 한국의 국토 자체가 너무나 작다.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대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하지만 디지털만큼은 다르다. 문명적 전환인 정보화의 영역에서 한국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앞서 나가고 있으며, 바로 여기서 한국은 문명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면서, 다극 세계의 제국들도 해내지 못 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다. 빅테크로 대변되는 플랫폼 기업들은 대부분 미국에 소재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 약진하고 있는 대안적 플랫폼들은 모두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스마트 시티를 비롯하여 정보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사회 시스템과 인프라를 설계하는 데 가장 앞선 곳도 중국이다. 한국의 어떤 부분이 앞섰길래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표준까지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회인지 묻는다면, 정보화의 가시적인 영역에서 쉽사리 대답할 수 없다. 초고속 인터넷망을 세계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설치했던 것은 빛 바랜 과거의 영광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