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K를 생각한다>에서 386세대에 대한 챕터를 쓸 때 여러 전직 운동권 선생님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당대 운동권의 정서에서 이촌향도라는 기원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문재인 정부가 선진국 중산층을 주된 지지 기반으로 삼으면서도 여느 다른 서구 정당과는 다른 낭만적 감수성에서 기원한 분배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회주의라고 해도 납득이 잘 안 갔던 게, 내가 아는 사회주의는 원자력 발전소와 트랙터 공장을 무자비하게 찍어대는 국가 주도 산업주의와 동의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상화된 전통의 도덕 공동체에 대한 희구라는 렌즈를 통해 80년대 운동권을 보게 되면 많은 것이 설명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63년생이신 아버지를 통해서 70년대 한국 집성촌의 일상과 문화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작금의 대한민국보다는 옛 조선시대와 본질적인 차원에서 더 가깝지 않나 싶을 정도로 생경한 시공간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내 생각의 줄기는 다음과 같이 흘러갔다. 한국 전통의 농촌 사회에서 유래한 정서를 품은 이 농민의 아이들이 대학에 갈무렵에 형성된 어떤 정서가 여전히 작동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은가. 낭만화된 전통 과거와 현실의 농촌 빈곤, 열악하고 혼란한 도시 환경,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발생한 부의 격차가 사회주의와 전통주의의 비전을 섞은 한국 사회운동 정신의 토양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는 중동의 이슬람주의나 남미의 해방신학과 유사하게, 1950년대 탈식민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한 세대가 도시화를 겪으며 분출시킨 지구적인 에너지가 아닐까.

반면 나는 2020년, 2021년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우파의 이념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고민을 기울이지는 않았었다. 나는 한국 우파를 볼 때 이념보다 경제와 개발을 생각했다. 그들의 지휘 하에 어떻게 한국이 후발국가로서 신속한 경제 추격에 성공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런 관심으로 재니스 미무라의 <제국의 기획: 혁신 국가와 일본 전시 국가>와 한석정 교수의 <만주 모던>을 읽었는데, 이때도 국가의 사회 동원과 자원 재배치, 자본에 대한 우위 확보 측면, 즉 발전 국가의 역사적 뿌리라는 관점에서 정보를 받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발시대 한국을 '강압을 통한 효율적인 물적 근대화 추진'과 '격렬한 사회 변동에 대항하는 이념적 사회 운동'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훗날 구해근 교수가 정리한 '강한 국가, 갈등 정치(strong state, contentious politics/society)'를 접하면서 과연 개발시대 한국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겠구나 생각을 했다. 아마 나는 당시 시장 자유주의나 우익 포퓰리즘을 제외하고는 우파의 이념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포퓰리즘도 '이념'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성격이 다르기도 하고).

하지만 이후에 뻗어나간 다른 관심사는 한국 우파의 이념과 연결되고 있었다. 나는 판카지 미슈라가 쓴 <분노의 시대>를 읽으며 볼테르로 대표되는 자유주의/계몽주의/능력주의의 계보와, 그에 대한 루소의 반발로 시작된 집단주의/낭만주의의 계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미슈라는 대서양 자유주의에게서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며 발흥한 여러 사상들, 집단적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그 부활을 꿈꾸며, 그를 위해 동원과 폭력을 불사하는 반란의 사상들을 훑어준다. 그의 책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 민족주의, 시온주의, 이슬람주의, 힌두트바에 이르기까지 동서를 아우르는 계보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때도 이미 신오스만주의, 이슬람주의, 힌두트바, 러시아의 신유라시아주의 등이 아시아에서 거대한 역사적 조류로 꿈틀대고 있었고, 서구에서도 트럼프로 상징되는 우파 포퓰리즘이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역사를 인식해야 현대 세계를 이해할 실마리를 얻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연스럽게, '동아시아에는 무엇이 있나?'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 과정에서 또 아시아주의에 관한 책도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적인 꼬리물기는 필연적으로 파시즘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용어로서 파시즘은 두 가지 극단을 오간다. 가장 널리 퍼진 건 정치적 욕설로서의 파시즘이다. 좌파가 국가주의, 집단주의 우파에게 파시즘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일은 전세계 어디서나 흔한 일이고, 특히 거리의 행동주의 우파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물론 반대로 우파에서도 좌파에게 파시즘의 딱지를 붙인다. 공산주의나 파시즘이나 사회의 기본 구성 단위인 개인을 부정하고 집단을 숭상한다는 것이다. 이 두 관점은 냉전 시기에 미소 관계가 반파시즘 동맹에서 냉전 경쟁으로 전환되면서 널리 퍼졌고, 파시즘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관한 학계의 논쟁과도 이어졌다. 좌파에서 파시즘은 특정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들이 처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반동 세력과 정치적 제휴를 맺고 대내외 모두에 폭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로 한 체제다. 반대로 우파에서 파시즘은 스탈린주의를 포괄하는 더 상위 개념인 ‘전체주의’의 일종이고, 파시즘 운동 초기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의 역할에 더 주목한다. 자유시장경제를 향해 널리 퍼진 사회의 불만과 환멸이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 충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