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정신은 가장 단순한 이유에서 90년대에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바로 시간의 흐름이었다. 20세기 전반이라는 위대한 혁명의 시대를 보낸 선배들은 80년대에 68정신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90년대가 되었을 때는 그럴 수 없었다. 이미 그 세대가 많이 죽었고, 노쇠해지고, 기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68세대는 계속해서 충원될 수 있었다. 68정신을 만들어낸 전후 풍요와 중산층 소시민 사회는 그 뒤에도 한참 더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68을 경험한 이들은, 그들 역시 취업을 하고 자산을 쌓고, 슬라보예 지젝이 한탄했듯 종종 맥주집에 모여서 “우리 그때 참 젊었지” 하면서 과거를 추억하기는 했지만, 그들 자녀들을 68의 후예로 키워내면서 인류 문화에 불가역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68과 히피즘은 대중음악에서, 할리우드 영화에서 계속해서 빛이 났고, 68키즈는 그것을 앞선 세대의 성경이나 공산당 선언과 다를 바 없이 숭배하며 정치에도 68정신이 스며들었다.
물론 68의 본의를 고수하려는 급진주의자들은 90년대와 00년대에 또 다른 기성세대가 되었고, 리버럴 혁명이 68정신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비판을 계속 제기했다. 요컨대 68정신은 상업화되었으며, 거대한 문화 자본, 나아가 팍스 아메리카나와 자본주의의 데코레이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사에 수백만, 수천만 달러를 벌어다주는, 68정신이 묽은 소스처럼 뿌려진 할리우드 영화에 대체 1968년의 이상이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이것이 뭇 논자들이 ‘혁명마저 파는 세태’라고 한탄한 경위였다.

하지만 각도를 달리 볼 수 있지 않겠는가? 68정신이 자본주의에 하이재킹 되어서 ‘리버럴 혁명’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본주의, 혹은 자유주의 전체가 68정신의 침투로 해킹되어서 ‘리버럴 혁명’이 시작된 것 아니었을까? 자신을 리얼리스트라고 항상 강변하는 미어샤이머는 아마 이 주장에 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미어샤이머는 1990년대에 시작된 나토의 동유럽 팽창을 참아줄 수 없는 이념의 폭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토 동진이 지정학적으로 전혀 타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하여 팍스 아메리카나의 안정적 구조 자체가 훼손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리고 사실 그가 옳았다. 나토, 나아가 미국은 동유럽과 유라시아라는 수렁에 어떤 대비도 하지 않고 뛰어들었다. 정책 결정에 중요한 동기가 된 이상주의는 분명 68년에서 왔다고 능히 추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