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는 리버럴 혁명의 시대였다. 21세기의 첫 사반세기는 완숙한 리버럴 혁명이 찬란하게 빛나면서도 서글프고 많은 경우 추하게 퇴조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리버럴 혁명이라는 게 무엇인가? 나는 2010년대에 나를 매혹시켰던 숱한 TED 강연을 떠올린다.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화려한 홀에 모여서 당찬 목소리와 제스처를 뽐내는 연사의 말에 집중한다. 그의 말은 대체로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혁신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세상엔 특정한 종류의 인권을 짓밟는 어떤 문제와 장애물이 있다. TED 강연은 모두 그 해결책에 대한 웅변들이다. 그 시행 과정에서 인권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인권을 증진시키는 ‘손 쉬운’ 해결책들이 제시된다. 이렇게 간단한 걸 시행하지 않는 건 그 자체로 비윤리적이다. ‘지금 당장 행동’해서 세계 어딘가에서 자행되는 인권 유린을 중단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소련 공산당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에서 개최한 어떤 행사의 연설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도로 이념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TED에서 제시되는 손 쉬운 해결책들은 우선 정부나 대자본의 손을 대체로 빌리지 않는다. NGO, 지역사회 활동가, 국제기구와 같이, 폭력과 강압이 연상되는 거대 권력이 아니라 미시적이고 연성적인 ‘넛지’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게다가 TED에서 연사들이 외치는 수많은 아이디어들은 비즈니스적으로도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인권을 늘리면서도 권력 기구에 타락하지 않고 돈까지 벌 수 있는 계책들을 하루빨리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이것만큼 이념적인 주장도 찾기 어렵다. 소련인들이 자신들의 마르크스레닌교가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강변했던 것과 아주 상통한 풍경이다.
나는 TED 강연 중에서 가장 재밌게 보았고, 또 가장 허망하게 보았던 것으로 파라그 카나라는 ‘세계시민’의 강연을 꼽는다. 북미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 인도인은 에너지, 교통, 통신 등 인프라의 통합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고 우리를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고 멋들어진 그래픽과 함께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강연에서 파라그 카나는 멕시코 장벽을 설치하겠다는 트럼프를 조롱했다. 강연이 이루어진 해는 2016년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장벽이 아니라 연결이다!’라고 하니, 모든 청중들이 박수를 쳤다. 하지만 이후 쏟아지는 조소를 받게 되는 이들은 트럼프를 비웃던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리버럴 이념의 신도들은 귀축미영을 아시아에서 격멸하는 근대초극 성전에 박수를 친 일본인들이나, 무산계급 세계혁명이 목전에 와 있다며 인터내셔널을 부른 모스크바의 사회주의자들과 꼭 닮은 것이다.